
/ 고민정 제공
(서울=코리아타임스) 정민호 기자 =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은 말했다. 만약에 KBS가 13년 전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고민정은 없었을 거라고.
KBS가 처음으로 출신학교, 출신지역을 가리고 실시한 2004년 테스트에서, 당시 24살이었던 고씨는 수많은 경쟁자들은 물리치고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 후보 선거캠프에 합류한 고씨는 지난 5월부터 청와대에서 부대변인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난 12일 행정자치부가 오는 9월부터 ‘블라인드 채용’을 전국의 모든 지방 공공기관으로 확대한다고 밝힌 뒤 일각에서는 “그럼 뭘 보고 뽑으라는 것이냐”는 불만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씨는 블라인드 채용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제도라고 믿고 있다.
지난 주 삼청동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고씨는 그 시절 어린 취업 준비생 고민정에게 그랬던 것처럼 블라인드 채용이 세상의 장벽이 너무 높아 보이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KBS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했다. 내가 30기인데, 당시 처음으로 모든 직종에서 출신학교, 출신지역을 지원서에서 가리고 테스트를 실시했다. 또 면접관들이 지원자들의 고향과 출신 학교를 추론할 수 없게끔 문서도 관리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기소개서에 은연중에 들어갈 수 있는 ‘부모님은 어디 출생이고, 저는 어디서 태어났고’하는 말들을 면접문서에서 미리 지워놨다고 한다. 실제로 1차 카메라 테스트, 2차 필기 테스트, 3차 실무면접, 4차 최종면접에서 직무와 직접 연관된 내용 외에는 평가 받지도, 질문 받지도 않았다.
“지방대 졸업생 비율이 확 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전에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는 학교 출신의 비율이 70퍼센트 이상에서 30퍼센트로 줄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내 동기들만 봐도 지방에서 학교 생활을 했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서울에 있어도 소위 명문대라고 이야기하는 학교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지방대 졸업생에게 특별히 가산점을 주지 않았음에도 비율이 늘었다는 것은, 명문대 졸업 여부가 이 사람이 그 업무에 적합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니라는 게 드러난 것이다. 그때부터 한 35기까지 블라인드 채용으로 뽑았다. 그 분들이 특별히 업무수행 능력이 떨어진다든지 사고가 많았다든지 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물론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나는 채용되지 못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경희대 수원 캠퍼스를 나왔다. 내가 98학번인데 당시 학교에서 KBS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국, 혹은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선배들을 내 기억에는 만난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아나운서 시험을 본다고 했을 때도 어느 누구 하나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도 그랬고, 심지어 부모님도 그러셨다. 절망적이었다. 나는 대학생활 동안에 많은 노력을 했고 능력도 갖췄다고 믿었는데 고등학교 점수로 나의 앞길을 재단해도 되는 것인가 반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일개 개인이 그런 제도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냥 부딪혀보자는 심정이었다. 어찌 보면 나한테는 운이었다. 그때 KBS에서 블라인드 테스트가 시행됐고, 무엇인지 알게 된 후 어쩌면 나한테도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정책이든 찬반은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역차별이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생각해보면 거꾸로 명문대 출신이 좋은 직장을 갖는 것이 정상이라는 기본 인식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중, 고등학교 성적의 결과물이 대학 입학이라면, 그 이후 4년간의 노력의 결과물은 입사가 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 고등학교 때 시험 성적이 대학에서의 배움과 활동과 무관하게 이 사람의 다음 단계라고 볼 수 있는 입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면, 단순히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으로 사실상 판가름이 난다면, 그것이 오히려 공정하지 않은 게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번에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의 취지도 그 사람의 진짜 능력만을 가지고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이고 선입견에 영향을 받는다. 어떤 구직자가 자기와 같은 고향이라든지 혹은 자기와 같은 학교 출신이라든지 하면 판단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사람을 볼 때 명문대 출신이라고 하면 ‘똑똑한가 보다’ 생각하고,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 ‘공부 좀 안 했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을 나무라는 게 아니고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오류를 방지하기 위한 게 블라인드 채용이다. 선입견이 생길만한 정보를 그대로 둔 채, 고용자에게 객관적으로 판단하라는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이건 제도와 시스템이 변화해야 되는 문제다. 그 당시 KBS에서 블라인드 채용 덕분에 나도 보호받을 수 있었고, 면접관들도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민간기업에서 어떤 채용기준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부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만의 영역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우리가 가야 할 지향점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직업, 재산 정도가 입사를 희망하는 사람 능력 판단 기준이 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가 일반 국민들이 수용하고 납득할 만한 것인지 한번 가감 없이 이야기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동안은 습관처럼, 그냥 그래왔으니까, 그래서 그냥 젖어 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도 변했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지금까지 그래왔다는 이유로 그런 항목들을 두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때 세상의 장벽이 참 높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그 시절 나에게 그랬듯, 나는 블라인드 채용은 희망의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희망. 우리는 늘 희망을 갈구하지만 과연 그것이 내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게 바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절망감이고 패배감인 것 같다. 희망이 없고 꿈꿀 수 없는 것만큼, 젊은 사람에게 큰 좌절은 없다. 어쩌면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블라인드 채용의 혜택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KBS 아나운서는 몇 명밖에 안 뽑으니까. 공공기관, 공무원 채용인원은 전체 구직자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난 블라인드 채용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시험성적이 좋지 않았어도 다시 노력해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고, 또 젊은 엄마들에게는 아이들에게 좋아하지 않는 공부를 어렸을 때부터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이다. 요즘은 고등학교 때만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게 아니고, 유치원 때부터 사교육을 시키기 시작한다. 결국 목표는 대학이다. 목표가 직업이 아니고 대학이다. 직업은 따라온다고 생각하니까. 근데 이제 이런 것들이 깨져나가기 시작하면 난 엄마들이 ‘우리 아이가 컸을 때는 세상이 변할 수 있겠구나’하는 희망을 품지 않을까? 나는 이런 희망들이 사회를 움직이는 아주 큰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국민들이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던 것 또한 절망을 딛고 희망을 찾기 위함이었다고 믿는다. 물론 그 목표는 조금씩 다르고 결도 조금씩 다르겠지만 최종적으로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은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함이었다. 이 사회에서 가능성을 찾기 위함이었다. 블라인드 채용은 어쩌면 그 희망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일 수 있겠지만, 특히 구직자에게, 젊은 엄마들에게 희망을 주고… 또 노년층의 부모님들이 자식들이 취직이 안 되면 걱정하신다. ‘내가 좀 더 잘사는 부모였다면’하고. 이렇게 스스로를 탓하신다. 그게 자신들의 탓이 아닌데도 말이다. 블라인드 채용이 물론 처음에는 낯설고, 여러 가지 보완해야 되는 점들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야 할 지향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이게 결국은 나비효과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희망의 씨앗이 되고, 꿈을 꿀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난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믿는다.”
행정자치부는 지난 12일 다음달 149개 지방공기업에 이어 9월부터 663개 지방 출자, 출연기관을 포함한 지방공공기관 전체에 블라인드 채용을 확대 시행하는 지침(가이드라인)을 배포했다고 밝혔다.
우리와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 차별의 소지가 있는 질문은 채용에 있어서 엄격히 제한된다. 미국 평등고용기회위원회(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에 따르면, 부모님에 대한 질문은 물론이고, 외모나 인종 차별의 소지가 있는 사진을 비롯해 나이, 성별, 종교, 자녀 여부 등도 물어선 안 된다.
10일 리얼미터가 블라인드 도입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참여자의 68%가 블라인드 채용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냈다. ‘객관적 평가가 어렵고 역차별을 일으킬 수 있어 반대한다’는 의견은 23.1%로 집계됐다. ‘잘 모르겠다’는 의견은 8.9%였다.